왜 국가와 기업의 권력 세습이 옳지 않은가? 단상

 요새 북한의 "3대 세습" 때문에 말이 많다. 진보연 하는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에게 "그럼 삼성일가의 3대 세습도 기업의 내부사정이기 때문에 간섭해선 안되는 것이냐." 라고 하고 있고, 공감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현재 북한의 3대째 권력세습에 대응하여 남한 또한 3대째의 기업 세습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건 매우 시의적절하다. 단, 여기서 "세습" 그 자체가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리를 해야 한다.

 사실, "세습"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내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 북한의 3대째 세습에 대해서도 "세습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고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삼성의 3대 세습에 대해서도 충분히 저런 식의 반박, 나올 수 있다고 여겨진다.

 북한의 세습은 세습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되고, "권력의 세습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도 보다 정밀하게 타격해야할 필요가 있다.

 국가권력이 민주적 통제 아래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합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의 성과이기도 하다. 북한이 세습이 아니라 설령 "집단 지도체제"로 간다 할지라도, 인민들의 민주적 통제에 놓여 있지 않은 이상, 비민주적 통치체제임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 집단지도체제 조차도, 지도층간의 견제가 일반적이라서 북한의 반인권적, 반민주적 상황에 대한 외부의 변화 촉구에 좀 더 반응하리란 기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봉건적 왕조 체제와 다름없는 "3대 세습"과는 다소 달리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3대 세습"은, 국가의 공적 권력을 그 어떤 공적인 성격의 검증도 거치지 못한 채로 봉건적으로 "책봉"되고, 그 아래에서 인민들은 그 어떤 정치적 자결권도 얻어내지 못한다. 그러한 비민주적인 상황은 억압을 낳고, 다시 북한의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상황은 악화된다. 3대 세습은 그래서 악질이다.(혹자는 각 나라의 상황이 다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북한인민의 권리와 다른 나라 인민의 권리가 다른가? 모든 인권은 평등하다. "상황이 다르다." 이 이야기만큼, 북한 인민의 인권에 대한 모독도 없다.)

 그렇다면 기업의 세습은 왜 나쁜가?

 사실 시장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업의 상속은, 그 자체로는 나쁠 것이 없다. 이를 테면, 영세한 중소기업 사장(주식회사도 아닌)이 그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준다거나, 슈퍼 사장, 음식점 사장이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준다거나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아들이 망치면 시장은 알아서 다른 대체 기업, 가게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식인들도 대부분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도 앞서의 "기업 상속"에 대해서 딱히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기업 권력 세습"에 대한 이야기는 왜 나오는가? 여기엔 분명히 맥락이 있다. 삼성 가문의 이병철부터 시작해서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즉, 여느 기업의 상속 모두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기업 권력 세습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리고 삼성의 세습은 명백히 편법과 불법으로 얼룩져있다. 삼성생명과 에버랜드로써 순환출자 구조를 통한 비정상적 지배구조. 그리고 그 비정상적 지배구조를 편법적 증여를 통해 상속세도 제대로 내지 않고 삼성그룹 전체를 상속하려는 이건희 일가. 그들의 순환출자구조는, 실제 개인 지분은 5%도 되지 않는 이건희 일가의 재계 1위 그룹 지배를 가능케 한다. 유한책임회사의 원리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5%도 안되는 지분이 50% 그 훨씬 이상의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 그 결정권만큼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지도 회의적이다. - 이것은 건전한 시장체제의 질서에 반하며, 나아가 가진 자의 위법이 용인된다는 측면에서 보편적 사회정의를 해친다.
 
 그러므로, 현재 삼성가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3대 세습은 건전한 시장체제에선 결코 있어선 안되는 권력의 세습이다. - 또한 그들은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보여지는 대로, 이미 단순한 사적인 기업이 아니게 되었다. 공적 부문까지 좌지우지하는 사적 <권력>이 되어 있다. -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매우 당연하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는 북한의 3대 세습과, 삼성의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은
 공화국의 민주 시민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도리인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 왜 썼나 싶을 거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101531581&code=910303





앞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9월 28일 김정은 후계가 공식화된 무렵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북한 당대표자회 3대세습 어떻게 보시나요?”라고 운을 뗀 후 “국가의 운명을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생물학적 우연에 맡기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게 저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가장 두려운 것은 북이 혼란에 빠지고, 권력의 공백을 친중 정권이 채우는 것일 것”이라며 “북한이 중국의 동북4성 중 하나가 된다면 통일은 더 멀어지게 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유 전 장관은 북한의 정권 세습을 기업세습과 유사하게 보는 시각에 대해선 “국가권력의 세습과 기업의 상속은 좀 다르다”며 “기업은 사적 권력이다. 한 기업이 세습 때문에 망하면 다른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대체가 불가능한 공적 권력”이라는 논리로 비판했다.






 

 너무 뻔해서 진짜...아오...


 지금 어디 기업 세습에 대한 말이 왜 나오는 지 몰라서 저러나?


 논리적으로는 저 말이 맞다. 그래서 한층 더 치졸하고 교활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권력 세습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 바로 뜨악하는 것이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사람들의 가열찬 비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왜 나쁜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할 수 있다. 세습이 안되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본주의가 너무나 당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적 권력", "상속", "다른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함, 시장이 해결해 준다."란 식으로 말을 한다면, 당연히 삼성의 기업권력 세습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은 매우 약해진다. 상속/세습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세습"이냐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잊혀져 버린다.


 아주 교활한 물타기다. 삼성의 세습은 세습이라서 나쁜 게 아니라, 앞서 말한 바 때문에 나쁜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 사회정의와 시장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또한 그것을 시장이 해결해준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시장에 대한 개입은 (이론적으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정부가 한다. 그러나 "삼성을 생각한다." 에서 보면, - 또한 실제로 요 몇년 전부터 드러난 삼성의 권력 추구형 위법을 보면 - 그 삼성은 시장질서를 교란하고 있고 행정부와 사법부의 주 요인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매우 당연한 듯 시도하곤 한다. 이러한 "사적 권력"을 단순히 시장의 자정작용으로 해결이 되나?


 저 논리는 결국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것이고, 그러한 고립 속에서 삶이 피폐해진 북한 인민들이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지나친 반발은 미국의 "이라크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란 제국주의적 시도이며, 내부에서 해결할 문제에 대한 외부의 명백한 내정간섭이다." 이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3대 세습에 대한 논리를 기업에 차용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긴, 유시민은 원래 기업과 삼성의 이익에 복무하는 데 충실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의료법 개악 시도로 의료 상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 현재의 의료법 개정안은 그 시절 개정안에 기초한다. - 국립의료원의 법인화를 추진했다. 국회에서도 통과된 예방접종 무료화 사업을 예산삭감을 통해 전면무산시킨 자도 유시민이다. "황우석 마피아"들이 위원이었던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그는 영리병원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어떤 식으로? "방향은 맞지만 영리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너무 이념문제로 몰아간다." 라고.  그리고 그 대신에 병원채권, 의료산업펀드 조성을 추구했다. 이건 뭐 조삼모사도 아니고. 물론, 이에 관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병원산업을 육성하라."고 지침을 내렸음은 물론이다. 유시민은 유시민주의자가 아니라 노무현주의자이므로, 이런 귀결은 당연하다. 삼성의료원과 삼성생명 매출 확대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민노당에게 북한이 "사랑"이라면, 유시민을 비롯한 보수정치권의 "사랑"은 삼성이다.


다 변태들 같다. 어디 사랑할 게 없어서...

 

어휴.

"착한 소비"란 게 있나? (이념적 소비면 어때?) 단상

정용진 부회장의 트위터에서 이마트 대형피자에 대한 글이 뜨자마자 "이념적 소비" 논란이 뜨거웠었다. 소위 '이마트 피자'에 대해서, 대기업이 영세한 동네 피자가게 돈까지 뜯어먹으려 한다는 불평에 정 부회장이 직접 트위터에 반박을 한 것이다. "니네가 재래시장 걱정하는 만큼 거기도 니네 걱정할 것 같냐", "정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고객의 선택으로 해결되는 문제이다. 여기서 굳이 <이념적 소비>(< >표시는 필자) 를 왜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대충 저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문제가 된 건 "이념적 소비"라는 말이었다. 네티즌들은 여기에 반발했다. “정용진 씨는 윤리적 소비를 ‘이념적 소비’라고 하는군. 까딱 잘못하다 ‘좌빨’로 몰겠네”,   “그 놈에 ‘이념적 소비’는 회장님(정용진 부사장) 머리속에 단단히 박혀 있구만요. 시장 상인이 가족인 사람들 앞에서 ‘이념적 소비’ 같은 얘기 꺼냈다간 뺨다구 맞을 것”, 등등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들도 아마, "이념적 소비"라는 말에 주목하여 기사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 조국 교수가, "우리는 이념적 소비, 즉 착한 소비를 해야 한다." 라면서 정용진 회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고, 현재 여기에 대해 이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이 반박을 하고, 조국 교수가 일일이 댓글을 달면서 논쟁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2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1. 이념적 소비란 말이 대체 뭐가 어떻다고 저렇게 유난을 떠는 것이며,

2. 그렇다고 특정한 소비 행태에 대해서 "윤리적이다.",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가?

에 대한.

  자꾸 "이것은 이념적 소비가 아니라, 사실은 윤리적 소비이다!" 라고 말하는데, 난 이게 더 불편하다. "이념적 소비가 아니라 윤리적 소비"라고 하는데, 이념은 나쁜거고 윤리는 좋은건가? "우린 좌빨이 아니고 상식"이란 드립과 흡사하다. 다른 이념"들", 다른 윤리"관들" 이란 말이 있듯이, 엄밀히 말하면 이념이나 윤리는 특정한 이념이나 윤리관 들을 통칭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이념과 윤리관에 의해 자신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재구축해나간다.

  이마트 피자나 ssm 규제에 대한 찬반은 분명히 어떤 특정한 이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생활인은 누구나 자신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형태의 소비를 해야한다. 물질적으로 필요하든, 정신적으로 그렇든 간에.

 나는 대형마트에서 싼값에 장을 보려는, 때로는 마감 시간 몇 분전에 떨이로 나온 걸 사려고 아우성치는 3~50대 여성 소비자들에게 "비윤리적 소비", "나쁜 소비"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자신과 자기 가족들의 경제적 안정을 더 챙기고 싶을 뿐이다. 이게 나쁜가?

 그들에게는 중소상공인의 삶까지 생각하는 '착한 소비'를 하고 싶다는 정신적 욕망이 희박하다. 그러한 정신적 욕망을 가질만 할 정도로 물질적 수요가 충분히 만족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지고 굳이 "윤리", "자신과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의 영세 상인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난 맹자가 묵자에게 가한 "무부지학"이란 말과,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란 말을 돌려주고 싶다.

 법학자인 조국 교수는 "우리는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를 해야 한다. 가격과 편리함만을 쫓는 소비행태를 벗어나 보자"라고 말했다. 물론, 그 주된 논지는 법적인 제도개선을 수반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는 공정무역 커피 등을 예로 들면서, "윤리적 소비를 주목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글쎄.

 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을 한번 보자.





 공정무역 관련 문헌을 읽으면...커피 농민을 뻔뻔하게 착취하는 가슴 아픈 얘기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 커피가 1000만 자루 더 생산되는 상태라면, 적절한 해결책은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다.(존재하지도 않는 서구 소비자를 위해 그 많은 땅과 노동력이 커피 재배에 소모되지 않았으면 사람들한테 정말 필요한 식량 생산에 대신 투입될 수 있었단 점을 명심하자.) 그러나 심은 묘목이 성숙할때까지 기다리는 데 드는 매몰비용때문에 수많은 커피 생산업자들이 경쟁자가 먼저 나가떨어지길 기다리며 버텼다.

 옥스팜과 기타 공정무역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선진국 소비자들이 생산자에게 커피가격을 높게 지불해서 공급과잉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략... 옥스팜의 보고서는 국제커피기구 사업부장 파블로 뒤부아의 말을 인용했다. "공정무역 운동은 품질좋은 상품을 구입하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생산자가 너무 낮은 현 가격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다 좋은 얘기이나 쟁점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관건은 생산자가 시장 가격의 두 배를 받으면 과연 생산을 축소하겠느냐는 것이다.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옥스팜은 자기들이 권하는 정책이 불러올 결과에 대해 솔직했다. 공정무역 가격으로는 커피의 과잉공급이란 근본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선적 가격정책을 제안함과 동시에 여분의 커피를 없애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커피 원두 500만 자루(예상 비용은 미화 약 1억 달러)를 구입해 폐기처분할 것을 권고했다. - p.205~206




 차라리 이럴 돈으로 후원을 받고 제3세계 농민들을 위한 운동을 조직해서 선진국들의 농업 보조금을 끌어내고 다국적 기업에 대한 규제를 촉구하는게 낫겠다. 문제는 부족한 식량에 대한 공급 확대와 이를 통한 제3세계 농민(커피 재배 농민 뿐만 아니라)의 처우 개선이지, 커피를 공정하게 사오면서 공정하게 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명박의 공정사회냐?)

책에선 이렇게 일갈한다. "부유해서 이런 짓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소위, 이마트 피자와 SSM규제에 관한 문제에 대한 "착한 소비" 이야기도 내가 보기엔 마찬가지로 들린다. 중소 상공인들의 딱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실 대형마트에 대한 수요가 동네 슈퍼 등의 영세 가게에 대한 그것보다 월등한 것은 소비자들이 영악하고 가멸차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형마트의 싼 가격과, 동네 슈퍼보다도 크고 검증된 브랜드 - 이를 통해 품질에 대한 믿음과 서비스에 대한 신뢰 등이 파생될 것이다. - 등은 동네 빵 가게의 부실해보이는 모습이나, 동네 슈퍼의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등에 대해서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 착한 소비를 해야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비자들은 싼 가격과 편리함을 제공받지 말아야 하는가?

 보다 더 싼 가격과 편리함이 상품 선택에 있어서 가장 큰 유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착한 소비"를 위하여 이를 포기하고 동네의 다소 비싼, 혹은 다소 불편한 상품 및 먹거리를 선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특정한 정신적 수요 - 욕망 - 의 효용이 동네 슈퍼와 대형 마트의 가격차이보다 더 크다는 소비자의 판단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그들 "윤리적 소비자"들의 특정한 소비패턴일 뿐, '선하다.'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시장경제 내부의 생산과 소비에는 선악이 없는 법이다.

 오히려 대형마트의 등장에 대한 중소 상공인들의 대응에 주목해야 한다.

 SSM규제에 대해 상인 조합에서 몇년 전부터 강하게 여당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있다. 물론 그게 가장 크게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대형마트와 경쟁하기 위한 혁신을 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한국슈퍼마켓 협동조합의 통합 브랜드인 바로코사(코사마트)의 출범, 인천에서 영세슈퍼들의 통합물류센터 신축 등이 그것이다.

 소비자들에게 이로운 혁신을 이루는 방법의 한가지 중에는 어쨌든 외부충격 - 이게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혁신을 위한 가장 극단적 외부충격 시도가 바로 한미FTA였다. - 이 있는 거고, 동네 슈퍼 및 중소 상공인들에 대한 충격은 바로 이러한 혁신에 대한 시도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SSM규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충격은 어디까지나 혁신을 위한 자극이어야지, 치명상을 입혀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꾀하고 조절하는 것은 바로 정부의 의지와 성향에 달렸다.)

 피자나 치킨 등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런 동네 음식배달 업체들의 타격이 심해지고, 체인점들이 속속 문을 닫는다면, 그러한 프렌차이즈 업체 및 동네 배달업계들의 조합 및, 연계망이 생겨야 할 것이고, 프랜차이즈 업체가 받는 수수료도 상당부분 낮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마진을 낮추고 가격을 낮추고 질을 높이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시도를 하려면, 조국 교수가 말한대로 "헌법 119조에 있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념"에 따라 법안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운동을 조직하는 게, 개개인의 착한 소비보다 훨씬 더 윤리적일 것이라고 본다.

  이같은 주장 또한, 말 그대로 어떤 "이념"이다. '윤리적 소비'를 한다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것이다. 소비운동으로 동네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그러나 윤리적 소비이든, 다른 소비이든 간에, 그 소비가 각자의 사고방식과 생활을 만족시키는 제각각의 특수한 소비패턴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착한 소비"가 아니라, 그냥 '어떤 소비'일 뿐이다.


 이쯤에서 처음에 제기했던 대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이념적 소비라고 하면 안되는건가?


 난 그 이념적 소비를, "윤리적 소비"라고 미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런 소비운동이 나온 의의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런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함도 인정하다. 대기업들의 변화는 결국 소비운동, 기존 생산자의 혁신, 정부의 제도 개선 등의 박자가 맞아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념적 소비"는 안되고, 그런 소비행태만이 "착한 소비"란 말인가? 사실은 그렇게 품질 여부보다 좀 더 비싼 돈을 내고 자신의 "정신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른바 "착한 소비자"들의 수요이다. 이른바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라 함은, 그러한 사람들의 <정신적 수요>에 맞는 공급이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난 "착한 소비"를 중간계급의 정신적 욕망이라고 밖에 정의하지 못하겠다. 그건 욕망이지, 윤리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 생활양식 등이 정확히 어떤 이념인지, 어떻게 타인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윤리"라느니, "이것은 상식"이라느니 하는 게, "윤리가 아니라 이념, 상식이 아니라 빨갱이"면 함께 할 수 없다는 속내를 비추는 것 같아서, 정말로 불편하다.

그렇지, 당신네들은 "이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상식인"이고, "좌파가 아니라 상식밖에 모르는(라고 쓰고 '노무현밖에 모르는' 이라고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민"이겠지?

 삼성 욕하는 애플 광신자들이 삼성장학생 이광재 안희정에게는 그 빠심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개방한 이명박을 욕하면서 한미FTA 4대 선결조건으로서 미국 쇠고기 수입재개를 최초로 허용한 노무현을 위해 눈물흘린다.

 그들이 허세욱을 알까? 배달호를 알까? 김선일을 알까?
 모두 정부에 의해 돌아가신 분이라고 하면,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냐고 하겠지.

  타인들의 다양한 다름을 볼줄 모르고 무조건 "저 나쁜 놈들을 물리치려면 함께 뭉쳐야만 된다! 안 뭉치면 니네도 나쁜 놈들!"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부 보수논객들이 그런 사람들더러 "홍위병"운운하는 것도 한편 이해가 된다.


 요새 들어 이념적 소비란 말을 거부하는 건, 내가 보기엔 그냥 "난 이명박이 싫어요." 표현하는 것인 듯 하다. 그러면서 "나는 착하고 바르게 살고 있어요."라는 자기만족의 욕망을 충족시켜나가는.

 결국 욕망의 소비이다. 그조차도 자본주의적이다. 슬픈 일이다.
이글루스 가든 - 제대로 된 글 쓰기.

전작권 환수 떡밥에 대해 단상

(트위터에 쓴 글 여기에 그대로 붙여넣기 함. 다듬어서 쓰기엔 많이 귀찮네 요즘.)

 

 

사실,진보신당의 이번 전작권 환수 연기 논평은 맘에 안 든다.

 

미FTA빅딜은까야제맛이지만, 글쎄, 전작권 환수연기와 군사주권 이야기라니...2012년,미국의 계획에 따른 전작권환수를 위해 노무현정부의 국방개혁2020은 거의747수준의 국방비증액을 예정했었다.


 

평화를이야기하는정당에서<군사주권>이야기하는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국익을 위한 파병"을 이야기하는 <노무현 프레임>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히려 환수 연기를 통해 돌려질 수 있는 국방 예산에 대한 새 프레임을 짜야 할텐데...

 

진보신당은 군사주권 드립을 칠 게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계획해놓은 국방비 증액 수준에서 전작권 환수를 통해 돌려질 수 있는 예산에 대해 분석하고, 이 예산을 어떻게 사회복지 각 분야로 쓸 수 있을 것인가 논평을 냈어야 한다. 요새, 너무 아쉽다. 우리

 

http://j.mp/dhdTW8 역시 경기동부의 소리 답다. 저건 이명박 정부가 또 똘추짓을 한게 하니라, 747 수준으로 노무현이 늘려놔버린 국방중기계획에 의거한 전작권환수에 대비한 국방예산 증액이 딴데 돌려질까봐 저러는거다.

 

즉,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그저 딱히 현재의 국방부와 <친하지 않은> 것 뿐인것 같다. 사실 전작권환수는 빠를 수록 미국에게 좋다. 저걸 욕하는 건 반MB차원의 진영논리, <노짱 ㅠㅠ> 정서에 편승한 비지론적 마인드, 그리고 민족주의 때문이다.

 

미국이 2009년 전작권 조기이양을 추진할때 참여정부가 미국과의 갈등을 불사하며 2012년 환수로 연기해놓은 것도 그럼 똑같은 논리로 개드립이란 말인가? 이쪽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들 머리속의 지우개가 정기적으로 기억 파일들을 삭제라도 하는건가?

 

지금 진영논리로 무조건 이명박 욕할 것이 아니라, 한미FTA를 통한 빅딜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고, 그리고 전작권 환수 연기를 통해 돌려질 수 있는 국방비를 사회복지 및 중소기업과 영세상공인 지원에 쓰여져야 한다고 해야할 때이다.

 

사람들은 이명박이 나쁘고 한나라당이 나쁘고 미국이 나쁘기 때문에, 세상을 복잡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구별된 만화적 세계관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불행히도 세상은 점점 복잡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펌] 왜 한국에서는 여성을 징병하지 못하는가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많인 관심을 가질수 없기에, 거칠게 짧게만 이야기 하도록 할께요.

우선.

1) 저 군대 갔다 왔습니다.
(의외로)전방에서 복무했으니... 설마 이런걸(군대경험)로 논의를 돌리시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군대 갔다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나마 좀 본게 있기에(체험적 지식) 현실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입니다.

2) 여성주의자도 아닙니다.

3) 이 논쟁에 대한 가치판단적 접근(양성평등, 국방의 의무, 시민권, 평화 등등)에는 관심 없습니다.


- 본론 -

남한 여성들은 왜 군대를 가지 않는가.
애초에 문제 설정이 잘못 됐어요. 한국은 여성징집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 사병으로 가고 싶은 여자가 있어도 군대에 갈 수가 없습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왜 남한에서 여성들은 군대에 사병으로 갈 수 없는가"를 논하겠습니다.

1) 징집 제도가 없습니다.
저런,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군요. 그렇습니다. 이 경우 제도를 만들면 됩니다.


2) 시설 문제
그러나 징집제도만 있다고 징집제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들 군대오면 막사도 지어야 하고, 여자 화장실도 만들어야 합니다. 이거 돈 좀 듭니다. 돈을 아낄려면 사병들이 삽들고 개고생해야 하는데....

3) 보급품문제
군복도 줘야하고... 속옷이나 생리대도 보급을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급을 해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지원은 있어야 할 겁니다. 이 경우... 또 돈듭니다.(아, 불쌍한 보급계원들....)

4) 교육지원
새로운 집단이 군에 오면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여성 사병들을 개념이 잘 탑재된 훌륭한 군바리로 만들려면 이런저런 교육들이 필요할 겁니다. 이를테면 훈련소에서 수류탄 훈련할 때 여성 훈련병들이 약한척 하며 엉엉 울면 어떡합니까. 거칠고 단순한 훈련소 조교들은 당황할 겁니다.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확충해야 할 겁니다. 결국 연구와 비용이 듭니다.

이런 잡다구리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시민사회에 "여자도 집징하자", 따위의 소리는 안하는 겁니다. 돈들고 귀찮거든요. 당장 국방력에 도움도 안되고요.

예로 드신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운좋게(혹은 국방부 장관의 선견지명으로) 애초에 군대를 만들때 여자도 징집 할 수 있도록 군대를 세팅해 놓았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창군시 얼마나 상황이 열악했는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초기에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여성징집제를 구축하는데 따르는 비용이 높지 않습니다. 문제는 남한 군대는 이런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구축된 군대입니다. 그 뒤 50년이나 지나서 이걸 구축하려면 정말 등골이 빠지는 일이죠. 그래서남한 국방장관 같은 양반들은 여자도 군대가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 징집제를 운용할 경우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군대내 성폭력의 문제입니다. 혈기왕성한 남정네들을 모두 잠재적 성폭력범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징집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의 군대내 성폭력의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여군의 40%는 성폭력 범죄에 노출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욱 열악한 한국 군대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군대를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고대 그리스부터 줄곧 제기되어온 문제입니다(제대로 따지면 인류 문명의 탄생부터..). 그러나 이것저것 다 떠나서 일단 국방력이라는 프레임도 중요한 것이겠죠.

저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능력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이미 오래전에 진화생물학에서 결론이 나온 이야기지요. 어떤 여성은 분명 어떤 남성보다 근력이 우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통계적으로 대다수의 여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즉 여성징집제를 유지할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군의 전투력 문제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의 문제도 발생합니다.


위에서 예로 드신 이스라엘이나 유럽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철저한 병과구분으로 해소하려 했습니다. 행정이나 방공포병등에만 여군의 임무를 국한시키는 것이죠. 뭐 백번 양보해 그렇게 한다고 칩시다. 이 경우 편재개혁에 따른 발생합니다. 기껏 교육시킨 병력들을 신참내기 여군으로 전환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http://pds17.egloos.com/pmf/201002/24/15/d0079315_4b84eaa6422c6.jpg
본격_이것이_현실.jpg

대략 위와 같은 이유로 남한에서 여성징집제를 운용하는 것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릅니다. 여성징집제를 주장하시려면 양성평등, 이런 추상적 가치 말고, 예산과 제도를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한 뒤에 주장하는 것이 생산적 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짜고짜 여자도 군대가라고 등떠밀면 곤란합니다. 결과적으로 여성이 군대에 갈수 있는 시스템이 안갖춰져있는데, 자꾸 군대가라고 주장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냥 예비역 꼰대의 말로 오해받을 소지가 높아요.
 


----------------------------------------------

- 사족들

순전히 제도 시행에 따른 비용, 국방력 차원에서 단순하게 접근하면 저런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치적 차원에서 여성징병제에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양성평등과 여성의 시민권이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면 아주아주 복잡해진다.(즉 여성징병제를 반대하는 논리의 설득력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확실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평화론자들의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서 남자도 여자도 모두 군대 안가야 한다... 는 공상적 주장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구도에서 굉장히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만년떡밥 이스라엘군에 대해서 좀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이유로 여성징집제를 우지하는지, 국방력 차원에서 유지하고 있는지 파해칠 필요가 있다.(나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한국처럼 대규모 군대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에서 시민사회에서 군대문제게 주되게 회자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시민들이 군사파시즘에 물들어서 그런게 아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봐도 크고 아름다운 군대를 가진 나라다.) 운동권, 좌파, 평화주의자들은 이념적 접근을 떠나서 군 문제에 대해 면밀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평화 운동을 한다면 평화적 감수성 운운하기 전에 밀덕 이상의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참고하라. http://coldera.tistory.com/93

(퍼올린 곳 : solid.or.kr)

어떤 고백 : 안티조선운동의 종언 단상

솔직히 개인적으로 한겨레의 기사가 "패드립"인지는 잘 모르겠다. DJ와 노무현의 차이를 딱히 모르겠는데,(내가 본 인터넷 판 기사에서는 그냥 노무현이라고 되어 있었다.) "놈현" 관장사라고 헤드라인을 그렇게 뽑았다면, 뭐, 욕먹을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변호해주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유시민의 절독 드립은 아무래도, "조선일보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겠다."라는 1기 안티조선 이후 점점 변질되어오던 그 안티조선이, 그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대한 안티조선의 뜻은, 단순히 그들의 <선정성>에 비판을 가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선정성보다도 앞뒤 맥락 다 짜르고 인터뷰어의 진의를 곡해하거나 사태를 왜곡하여 부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동>하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양비론"을 통해 결국엔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해서 "제 자리를 찾아주자"는 것이었지, 단순히 그 정치적 포지션 자체가 싫어서 무조건 안티, 무조건 안보기의 일종의 <교조>를 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일보에게 "언론으로서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떤 원칙이나 이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언론의 공공성에 대한 싸움이었지, 결코 특정 정파의 운동이 아니었다.

유시민의 절독선언은, 그런 의미에서 안티조선운동이 사실은 <특정 정파의 운동>으로 변질되어버렸다는 어떤 고백일 뿐이었다.

 물론, 난 한겨레를 원래부터 보지 않았다. 경향만 본다. 앞으로도 경향만 볼 예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한겨레가 "노빠적 성향" - 혹은 광의의 비지론적 성향 - 을 보이기에, 이에 대한 정치적 반대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들 또한 조중동과 다름 없는 선정성을 선보이면서도 "상식"을 이야기하며 진보의 "단결"을 추구한다는 점, 그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의 "범야권"에 대한 <양비론>은, 사실 조중동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프레시안이나 미디어 오늘 등과도 딱히 다르지 않다. - 오마이뉴스는 그냥 그런거 없이 그냥 친노라서 패스. 딴지일보는 언론이 아니라 서프라이즈 2기라서 패스. - 나는 그런 한겨레의 방침과 성향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유시민씨의 "한겨레 절독선언"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저 한 대담기사에서 "놈현 관장사"란 표현이 나왔고, 그 기사의 헤드라인에 다시 "관장사"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뭐, 한겨레의 헤드라인 "놈현" 드립을 변호해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대담의 전체 맥락과 기사 본문의 내용이 "노무현과 국참당 등에 대한 매도와 죽은 자에 대한 무례"인가? 매우 정당하고도 적확한 비판이라고 보는 건 나뿐인가? 이번 선거는 사실 2007년 대선때부터 항상 똑같았다. 모든 선거는 "노무현"에 대한 회고투표였다. 다만, 2009년 5월 23일 이전엔 한나라당이 이를 조장했고, 이후엔 민주당과 국참당이 이것을 조장했을 뿐이다. 전자는 정권 시절에 대한 회고, 후자는 인간에 대한 회고였을 뿐이다. 그리고, 정책과 정치에 대한 분야인 선거에 있어서 전자보다 위험한 것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그 위험한 시체팔이가, 진정 노무현이 꿈꾸고, 사람들이 꿈꾼 나라가 무엇이었는 지는 철저하게 가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유시민은 이러한 기사의 주요 내용에는 침묵을 지킨다. 그냥 "관장사", "놈현"이 맘에 안들었고, 그랬기에 절독을 이야기한다.

 유시민이란 존재는 속칭 "아고라 좀비"가 아니다. 그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의 공개되는 언행은 정치적 의도를 띌 수 밖에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는 딱히 한겨레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없었고 단지 "놈현"이란 말과 "관장사"란 말에, 고인에 대한 무례에 격분해서 그랬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조선일보 안 보기의 의도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뜻과 상관없이 현재 여론의 추이는 어떠한가. "딴걸레"란 말이 거침없이 나온다. "의회 쿠데타" 운운했을 때부터, 그 무수한 선동과 다름없는 편집에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막말로 쥐새끼는 되는데, 놈현은 안되나?

 참여정부 시절의 노무현은 "놈현스럽다"란 말을 경향이나 한겨레에서 써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진 않았다. 참여정부의 섭섭함 토로와 과도한 언론탓은 그 끊임없는 남탓 속에서 거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표현 하나 콕콕 짚어가며 절독 운운하진 않았다. 그래도 대놓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여론의 향배는 한겨레의 부적절한 편집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듯 하다. "그 분에 대한 비판을 용납할 수 없다"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결국, 그 대담기사가 드러냈던 "시체 팔이 정치"의 치부는 가려지고, "무례한 고인 드립"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안티조선의 주역 한 명의 "안티 한겨레" 선언을 통하여 이 사태를 바라볼 것이다. 아무리 봐도 부주의한 편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그 기사가 전하는 비판의 지점조차도 헤드라인이 아니라 바로 그 유시민의 선동으로 왜곡되고 곡해된다.

 효과는 명백하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치부는 가려지고, 죽은 이에 대한 예절만 남게 된다. - 한 인간의 죽음을 "정치적 수단"이라고 폄훼한 자들이,(기본적으로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들어 낸 치들과 다른 게 뭐지?) '사람 한명 죽는 것 갖고' 국익을 포기할 수 없다라고 한 인간들이,(국가의 "이익"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국가의 구성원을 지켜내는 것은, "공화국의 의무"다. 유시민씨의 마지막 칼럼 마지막 줄에 있었던, 바로 그 "의무".) 어지간히 예의는 따진다. 거참. - 결국 비판이 봉쇄된다.

 참으로 훌륭한 정치 선동이다.

  이를 통해 안티조선 운동은 최종적인 종언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다. 초기에 조중동의 언론 공공성 회복을 위해, "조선일보 제자리 찾아주기 운동"으로 시작했던 안티조선은, 점점 특정 정파 - 노빠 - 의 스탠스에 발 맞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안티 한겨레가 안티 조선과 동일 선상에 놓여지면서 안티 조선의 "언론 공공성"에 대한 대의는 사라졌다. 여기에는 더 이상 자유주의가 없다. 특정 정파의 정략적 선동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언론의 제자리를 찾아줘야 할" 부분은 양비론, 곡해와 왜곡 등을 통한 선동을 막는 것에 있지, 부주의한 편집때문에 그 글의 진의까지 말아먹어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 분"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의가 모든 것이다. 배달호, 하중근, 김선일, 허세욱 등에게 지금 하는 것 반만이라도 예의를 차렸어도 고인드립 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알 바는 아닌 것 같다. 노무현 정부 시절 거시경제지표는 올랐어도 양극화는 심화되었다고 하면 조선일보의 논리라고 듣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에 거시경제지표는 회복이 되지만 양극화는 심화되었다고 하면 찬사를 날리지 않는가.

 이제 안티조선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나의 민주노동당은 창당의 주역인 권영길에 의해 분당이 되었다.
 나의 안티조선도, 그 태동의 주역 중 한명에 의해 그렇게,
 종언을 맞게 되는 듯 하다.

 이제 안티조선의 자리는 사라지고, 거기엔 유훈통치만 남았다.

 그냥, 이젠 그들이 집권했을 때 "봉하 70년(서기 2016년)" 뭐 이런 것만 안했으면 싶다. 그 정도가 이젠 내 소박한 소망이다.
 

1 2 3 4